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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아위아 vs 알리 = 수니파 vs 시아파
    서양사 2012. 5. 20. 21:53


    다들 잘 알다시피, 이슬람이라는 거대종교를 만들고, 아랍권을 모두 이슬람으로 통일했던 무함마드는 

    종교가 중에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성공자였다. 무려 정치, 종교, 군사, 경제에서 모두 성공했으며, 부인도 많았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본디 메카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계시를 받은 후, 거주지에서 포교에 나서게 되었던 무함마드는

    이후 10여년간의 포교로 당시 메카의 기득권세력이었던 쿠라이쉬족(이들은 다신교였다)에게 박해를 받게 되었고,

    622년, 이주를 하라는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는 무슬림들을 이끌고 야스리브로 이주를 하게 되는데 

    이를 헤지라라고 부른다.


    이때부터 야스리브는 예언자의도시라고 해서 메디나 알-나비, 즉 메디나라고 불리게 된다.

    당시 야스리브는 많은 여러부족들이 수자원을 둘러싸고 반목을 하고 있던 중이었고, 그들은 조정자가 필요했으며

    그 조정자가 무함마드라고 생각했기때문에 저항없이 받아들이게 된것이다.

    (이 헤지라의 과정에서 무함마드는 1대 칼리프인 아부 바르크를 만나게 된다)

    이후, 메디나에서 세력을 확장한 무함마드는 역으로 메카와의 전투를 벌이게 된다.

    대승과 대패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이슬람의 전파로 인한 메카무혈입성(630)이라는 대업을 이룬 무함마드는

    632년 엄청난 세력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아부 바르크-우마르-우스만(오스만이라고도 읽힘)-알리가 차례대로 칼리프(계승자)에 오르게 된다.

    근데, 우리는 여기서 아부 수피안이라는 사람을 떠올려야 한다.

    아부 수피안은 메카의 기득권세력인 쿠라이쉬족을 이끌던 수장이자, 대상인이었다.

    자신의 딸 들 중 하나가 무함마드와 결혼을 하는 바람에 이~~~상하게 이슬람으로 개종'되'고,

    그 후 무함마드의 친인척으로써 강한 세를 유지하게 된다.(그리고 무함마드보다도 오래 살았다)

    근데, 중요한건 아부 바르크와 우마르는 친무함마드의 세력이었으며, 

    예언자의 정책을 계승하였지만, 우스만은 아부 수피안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위이기도 했다)


    우스만은 아부 수피안의 사람을 시리아나 이집트의 총독으로 임명하는 등, 친 아부수피안정책기조를 유지했고,

    이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은 또한 예언자의 사위였던 알리를 중심으로 모여들게 된다.

    알리는 예언자의 사촌이자 양자이자 사위였다(응? 후에 시아파의 성인으로 남아있다).

    아부 수피안의 사람이었던 우스만은 알리에게 암살당하였고, 알리는 4대 칼리프로 등극한다.

     

    그때, 시리아의 총독으로 가있던 무아위아가 알리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난다.

    무아위아는 아부 수피안의 아들이었고, 반 알리파는 무아위아를 중심으로 모여든다.

    이슬람의 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알리파와 무아위아파로 나뉘어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지려는 찰나에

    알리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나왔던 무아위아는 창 끝에 코란을 달고 나오는 꾀를 쓰게 된다.

    즉, 전투가 아니라 코란에 의한 교리적 해석으로 싸우자는 뜻이었던 것이다.

    (물론 알리의 추종자들에 대한 계산이 포함된 행동이었다)

    덕분에 칼한번 잡지않고 학자들끼리 샤바샤바하고 있던 중에 제 성질을 못이긴 알리의 추종자들은 끝내

    알리를 살해하게 되고, 지도자가 없는 알리파 이슬람은 자연스레 무아위아에게 흡수되었다.

     

    # 이 과정에서의 무아위아는 정말 대단한 수를 던진 것이다.

    코란을 달고 나옴으로써 자연스게 학술적 토론으로 전투의 방향을 바꾸었으며,

    알리가 이에 어쩔수 없이 응대함으로써 당시 칼리프의 지위에 있었던 알리와, 

    시리아의 총독일 뿐이던 무아위아는 대등한 관계에 서게 된 것이다.

    학술적 토론으로 이어짐으로써 알리의 추종자 중에서 협상반대파들이 분파되어서 나오게 되고,

    토론의 결과 학자들이 무아위아에게 유리한쪽으로 해석으로 함으로써 

    칼리프였던 알리의 지위는 더욱 하락하게 되었다.

    그렇게 권위가 실추되고, 명분이 꺽여서 돌아간 알리가 추종자들에게 암살당한 것이다.

     

    이후 무아위아는 우마이야왕조(옴니아드, 우마이아 등으로도 읽힌다)롤 개창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성공한 예언자였던 무함마드는 결국 쿠라이쉬족의 수장이었던 

    아부수피안의 후예에게 그 성과를 건네주고 말었던 것이다.

    (이놈의 질긴 아부 수피안계는 아바스왕조가 들어서도 살아남아서 후우마이야왕조를 이베리아반도에 세우게 된다)

     

    이 무아위아와 알리의 대립이 아직까지 이슬람세계에서 대립중인 수니파와 시아파로 이어진다.

    수니파는 4대칼리프와 이후 무아위아의 후대 칼리프를 정통으로 보는 반면에,

    시아파는 예언자의 사촌이자 양자이자 사위인 알리를 정통 칼리프로 보고, 

    그의 후손들을 종교지도자로써 추종하고 있다.

     

    ps. 이슬람계의 국가명과 인명은 번역의 과정에서 많은 오류가 생겨져 있다.

    우마이야 왕조의 경우는 영문으로 Umayyard라고 쓰이지만, 

    정작 우리나라의 교과서에는 옴니아드왕조라고 되어있었던것으로 기억한다.

    예언자 무함마드 역시, Muhammad라고 쓰이지만, 이를 아랍어에서 영문으로, 영문에서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마호메트, 무함메드, 마호멧 등등으로 잘못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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